`화이부동`형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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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시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 댓글 1건 조회 3,184회 작성일 10-11-1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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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경영자와 같은 의견 내는 직원은 월급 도둑…반대 포용은 ‘조직 생존’ 필수 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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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군자의 조건, 즉 리더의 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강조한다. 그중 우선순위에 오르는 것이 편 가르기 하지 말고 개방적이 되라는 것이다. 깃발 아래 ‘헤쳐 모여’를 거듭하며 ‘우리가 남이가’를 연발하고 여러 가지 인연을 빙자해 형님 동생을 끌어주는 세태는 그때나 요즘이나 다르지 않았나 보다.

공자는 유독 조화와 뇌동의 차이에 대해 경계의 ‘죽비’를 여러 번 내리친다. 자로 편에서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던 그는 위령공 편에서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부주(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고 말한다.

우르르 무리 지어 몰려다니며 ‘단지 우리 편’이란 이유만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을 팽개치지도 말고, 편견에 휩싸이지도 말고 주관을 세우라는 것이다. 팔로워의 입장에선 소신 있는 반대가 필요하고, 리더의 입장에선 다양한 조직원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

케네디 행정부의 1961년 쿠바 피그만 침공은 동이불화식 의사 결정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케네디 대통령은 집권 초기 젊고 유능한 ‘케네디 복제인간형’ 참모들에 의존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해보겠다는 의지와 엘리트 의식은 하늘을 찔렀으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의 분위기는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 소수에 의존한 의사 결정 구조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쿠바 침공을 결정해 쓰라린 패배를 낳았다. 모두 같은 틀의 사고를 가져 진정한 조화를 추구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례를 경영학에선 집단사고의 오류라 칭한다. 응집력이 강한 집단 내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동질화돼 의사 결정 과정에서 대안들의 가정과 내용을 비판적이고 현실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상하좌우 소통의 피돌기가 선순환되는 조직은 늘 “맞소 맞소”가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눈에 파란 불을 튀기며 갑론을박의 논쟁이 양산된다. 위기는 조기에 감지되고, 허점은 일찍이 자체 내에서 발견된다. 이리저리 재고,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자신감은 가지되 적군, 경쟁자에 대해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이질성과 주장의 불일치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사불란, 일사천리의 동질성과 효율성을 경계한다.

오징어를 목적지까지 신선하게 이송하기 위해서는 ‘꽃게’라는 끊임없는 위기 조장 요인이 필요하듯 조직의 의사 결정에 이 같은 반대분자와의 갈등 토론은 필수 요소다. 그러기에 당 태종은 늘 거침없는 직언에 늘 숨을 몰아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도 위징을 재상으로 ‘모시고’ 직언을 해주길 ‘간청’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항우조차도 바른 소리 잘 하고 아버지뻘의 범증을 속으로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어 하면서도 ‘아부’로 대우하며 곁에 두었던 것이다. 차량 배기가스 계측기 세계 1위업체인 호리바 제작소의 창업자인 호리바 마사오는 아예 최고경영자와 같은 의견을 내는 부하직원은 복제인간으로서 월급 도둑이라고까지 극언할 정도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할 바에 10명, 100명 같이 모여 아이디어를 낼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같은 다양성을 통한 발전 논리를 몸으로 가장 잘 실천한 리더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박현모 세종연구소 실장의 지적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자신의 외교정책 기조에 늘 반대를 일삼는 재상 허조를 ‘고집불통이야’라고 말하면서도 그를 배제시키지 않고 늘 어전회의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혹시라도 신하들끼리 편향성을 가진 결정을 내릴까 우려해서였다.

한글 창제에 아득바득 반대한 최만리를 기꺼이 포용한 것도 바로 자신이 보지 못한 ‘틈’을 보길 기대하는 의도에서였다. 세종은 반대파의 주장에서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정책의 정당성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키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 역사상, 아니 역대 한국 역사상 자신의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서도 왕에게 죽어서까지 대우받은 행복한 신하란 부러움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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