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동창회 졸업 40주년 추억여행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손동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 댓글 0건 조회 7,051회 작성일 15-05-16 20:23본문
[ 게시자 배경 설명 ]
김영욱 고문님께서 40주년 추억여행기를 수성인 제20호 회보 원고로 보내오셨으나 회보의 지면 관계상 전문을 게재하지 못하여 부득이 하게 공지글로 올려 드리게 되었습니다. 김영욱고문님께 감사의 인사와 함께 사죄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글을 게시합니다.
* 총동문회 홍보국장 손동선 올림 *
졸업 40주년 추억 여행기
- 졸업40주년 추억여행 준비위원장 김영욱(18회, 고문)
《두려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더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청춘이 벌써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기 시작했을 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감싸 안는다.
졸업 40주년! 나이 60살! 이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주체 할 수 없는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나는 내 나이 50살 정도만 되면 아주 근사하고 지적인 사람으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멋진 중년신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50살에 10년을 더 살아온 나는 종종 점잖은 척 폼을 잡아 보지만, 아직도 나는 친구들을 만나 소맥폭탄주 몇잔을 넘기면 말투는 벌써 거칠어지고, 노상방뇨도 서슴치 않는 아주 볼품없는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그래서 가식같은 것이 필요없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말이 통하는 것 같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지친 심신은 60살이라는 나이에 좌절하고 만다. 두려움이 나를 다시 감싼다.
이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고등학교때 친구들과 일을 벌이는 것이 유일한 해방구이다.
《설레임》
졸업 30주년 홈커밍데이를 처음으로 행사답게 치른 수성 18회라는 자부심이 덧붙어져서, 당시 준비위원장이었던 나는 졸업 40주년 기념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까 고민을 하다가 문득 고등학교 때 갔던 수학여행 코스로 추억여행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40년만에 다시 친구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추억여행을 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하자마자 마음속에는 오랜 친구들과 여행을 한다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있던 구상을 몇몇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자 너무 멋진 생각이라고 반기면서도 1박 2일의 여행에 과연 몇몇의 친구들이 동참할 수 있을 지 걱정도 된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그래서 설레임을 현실화시키기로 다짐을 한다.
《작당모의》
현 동창회 집행부와 직전 동창회 집행부 모임에 추억여행에 대한 구상을 이야기를 하자, 나도 너도 후원금을 내겠다고 하면서 전폭적인 지지의 발언들을 쏟아낸다. 2014년 12월 송년회 모임때 추억여행을 정식안건으로 상정해서 승인을 받고 나는 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추진위원장으로서 추진위원들을 잘 구성하는 것이 급선무여서 처음 전폭적인 지지의사를 표시하였던 현, 전직 동창회 임원들과 각 모임의 대표들로 구성된 12명이 2015년 2월 7일 제1차 추진위원회 개최하여 40주년 추억여행 추진방법 결정 및 추진위원회 결성의 추진위원이 결성하고 여행일자, 장소, 행사스케줄, 예산, 참여율제고 방안, 추진위원 역할 분담, 홍보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여 확정하였다.
본가에 있는 졸업앨범에 있는 졸업생 명단을 복사하여 반별로 한명 한명씩 추억여행을 함께 할 수 인원을 체크한 결과 80명이 함께 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되었다.
《파란만장》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추억여행에 동참을 하겠다고 의사를 표시를 하였으나 실제 여행경비를 입금하는 친구들은 지지부진하였다. 게다가 실제로 여행을 가는 친구들은 30명 내외가 될 것이라는 자조적인 소리까지 추진위원들사이에서 들려온다.
수성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떤 모멘트가 필요하였다.
끼리끼리 만나는 친구들 모임을 파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모임의 대표격인 친구들을 전화하고 만나서 설득을 하였다. 그리고 상징성이 있는 친구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리고 참여희망을 표시한 친구들 명단을 매일 업그레이드하면서 단체 카톡에 올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또 추진위원회의를 몇차례 하면서 아이디어를 모으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70명이 여행에 참석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위원들이 친구들을 한명한명 맨투맨으로 책임지기로 하였다.
《눈물의 자부심》
여행일정을 만들고, 기념행사 내용도 정리하면서 친구들이 추억여행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선뜻 많은 후원금을 내겠다는 친구도 나타나고, 버스를 후원하겠다는 여행사를 하는 친구, 기념품을 후원하겠다는 친구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새로운 수성의 역사를 써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서로 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
29회 문경식 후배가 수성의 역사를 써 나가는 18회 선배들을 위해 동영상을 무료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우리가 수성 18회 졸업생 나아가 수성인이라는 사실에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일곱 번이나 넘는 추진위원회의를 개최하고 2차례 답사를 다녀오면서 우리는 수성의 역사를 만드는 주역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참여의 열기가 높아지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친구들이 참여의사를 표시하고 여행비용 및 후원금을 입금하기 시작하였다. 추진위원들은 자기의 역할 이상을 하면서도 회의 때는 자기 생각과 다르게 의사결정이 되어도 서로 양보하고 이해를 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이제 모든 것은 준비가 완료되었다.
《40년만에 만난 교정》
4월 18일 토요일! 18회 동창들이 40주년 추억여행을 하는 날이다.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입장에서는 당일 날씨와 참석인원이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화요일부터 오던 비가 목요일이 되어도 그치지를 않는다. 일기예보에도 토요일은 맑고 일요일에는 비가 온다고 한다. 어쩌면 고등학교 2학년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그 때와 날씨가 똑 같을 수 있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도 설악산에 이슬비가 내려 비닐우산을 쓰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당일 아침에 몇몇 친구들에게 문자가 몇 통 왔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참석을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총 여행비용을 납부한 인원이 75명 중 개인사정으로 여행을 못하는 친구들 10명을 제외하고 65명이 추억여행을 함께 하기로 되었는데, 벌써 또 2명이 불참하게 되었다. 예상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는 4월 18일 9시에 모교 교정에서 정확하게 40년만에 다시 만났다.
고등학교 2학년때 수성중학교에서 책걸상을 들고 이 곳 대유평으로 이사를 오던 생각이 어제일같이 생생하기만 하다. 논 한가운데 덩그러니 지하1층 지상 2층의 건물은 이제 지상 4층의 당당한 건물로 변신하고 주위에는 단독주택들이 들어서 당시의 모습과는 사뭇달랐지만, 우리가 꿈을 키웠던 대유평의 교정은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건물의 연수만큼 세월이 흐른 뒤 만난 낡은 교정은 “어느새 너희들도 우리만큼 많이 늙었구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학창시절 회장과 학도호국단장, 동창회장, 나 이렇게 5명이 옛날 교복으로 갈아 입었다. 이제 현재의 우리가 아닌 40년전의 학창시절로 순간이동을 한 것이다. 한명, 두명 짝을 지어 도착한 친구들이 훌쩍 70명이 넘었다. 아들이 다쳐서 못온다고 문자가 왔던 친구도 보인다. 도무지 안가면 평생 후회를 할 것 같아 애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왔다는 것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 진다.
아! 내가 추억여행을 갈망했던 것 이상으로 친구들도 우정에 목말랐던 것이다.
그동안 직장잡고 결혼하고 애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달려온 서러운 세월도 이제는 서로 서로 위로를 받을 때가 된 것이다. 대부분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공무원, 교사들만 현직의 끄트머리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건강걱정을 한다. 불과 10년전에 30주년 홈커밍데이의 모습과 사뭇달랐다. 그때는 조금 잘나가는 친구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경쟁의식이 있었는데, 이제는 서로 건강을 걱정하고 친구 자식걱정을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모교에서 학교현황과 교육목표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학교 교정을 보고 운동장에 모였다. 마침 모교는 개교 60주년 기념주간이어서 사진전을 하고 있어 운동장을 한바퀴 돌면서 이를 감상하였다. 처음 대유평으로 이사를 왔을 때, 운동장은 고구마밭에서 줄기를 걷어낸 그대로였다. 우리는 체육시간에 매일 운동장 고르기 작업만 하였다. 축구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거의 1년동안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나에게 꿈을 심어주고 호연지기를 키워주었던 대유평이 아닌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운동장 가운데로 모였다.
“대유평 솔바람에 기세좋게 날리는,,,,,”우리는 힘차게 교가를 불렀다. 묘한 감정이 우리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부터는 40년전으로 돌아가는 거다.
《설악산으로 고고》
학교주변은 매우 복잡하여 버스가 운동장까지 진입하지 못하여 슬기샘 도서관까지 이동하여 버스에 탑승하였다.
드디어 추억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버스가 설악산으로 출발하자마자 버스안은 시끌벅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언어가 요즘 듣던 그런 언어가 아니었다.
우리들은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40년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짠지! 야 씹새끼야”라는 말이 욕이 아니라 친근감의 표시하는 것을 40년만에 새삼느꼈다.
여기저기에서 그때의 단어도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40년전의 학창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들이 생각하는 그냥 공부좀 잘하고 사고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나의 인상은 어느 정도 조작되었다고 스스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방항아! 엉뚱한 면이 너무도 많았던 학창시절의 나는 통제불능이었다,.
그래도 이만큼 반듯한 모습이 된 것만으로도 나는 대유평에게 커다란 신세를 진 것이다.
학창시절 얌전하기만 했던 원유친구는 집에 담근 솔입주를 배낭에서 꺼내 한잔씩 돌리더니 뒷좌석은 어느새 술판으로 변했다.,
취기가 오른 친구들은 마이크를 잡고 노래인지 웅변인지 알수 없는 목소리로 한곡조씩 뽑는다.
우리들이 탄 버스는 어느틈에 문막휴게소에 도착한다.
시간이 20분이상 지연되어 휴게소의 휴식시간을 10분으로 단축했음에도 한명도 지체없이 정확하게 버스에 탑승을 한다.
버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예상보다 도로는 막히지 않아서 좋다
점심장소인 평창 진부 부일식당에 도착한 것은 예상보다 20분늦게 오후 1시에 도착하였다.
기증받기로 했던 캔맥주가 불발되어 버스에서는 개인이 갖고 온 것 이외는 술이 없었다.
식당에 도착하여 우리를 반긴것은 산채비빔밥이 아니라, 막걸리, 소주와 맥주였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서 현명해저서 무리를 하지 않는다. 아니다. 저녁때를 위하여 술주머니를 비워두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60명이 넘는 인원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에 정말 많은 친구들이 동참을 하였구나!라고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밥만 먹고 나와 커피한잔을 하고 있는 친구들은 어김없이 학창시절 모범생모습 그대로이다.
아직도 몇 테이블에서는 며칠전에 만났던 친구들처럼 아주 다정하게
이야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맛있는 욕과 함께!
3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40년의 벽은 이렇게 허물어져 버린것이다.
2시가 조금 넘어 양양 낙산사로 출발했다.
우리가 수학여행을 갈때는 영동고속도로고 개통되기 전이어서 구불구불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그래서 처음 계획은 진부에서 국도를 타고 낙산사로 가면서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의 기분을 느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버스는 어느틈에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을 하였다.
덕분에 예상한 시간에 맞추어 낙산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낙산사는 불에 타서 재건축을 하여 고풍스러운 맛은 예전만 못하였지만, 바다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40년전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였다.
특히 의상대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품었던 고등학교때 꿈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물가물 떠오지 않는다.
5시가 조금 넘어서 숙소인 델피노 리조트로 향했다.
《40주년 기념행사》
명색이 졸업 40주년인데, 그냥 설악산만 둘러보고 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멋진 4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였다.
리조트에 도착하여 짐을 숙소에 내려놓고 리조트 해바라기홀에 우리들은 모였다.
식전행사로 친구들의 공연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먼저 취미로 색소폰을 연주하는 백수철, 임준호 친구의 색소폰 앙상블을 준비하였다. 거의 전문가 수준에 도달한 친구들의 연주에 친구들은 부러움이 섞인 박수를 보낸다.
두 번째 연주자는 음악을 전공하고 현재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고 있는 신동렬 친구의 환상의 바이올린 연주다.
신동렬 친구는 전문가답게 해설과 함께 감미로운 바이올린 연주를 해주어 몇차례 앵콜을 받았다.
이어서 정식으로 기념행사가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먼저 고인된 친구들에 대한 묵념, 참석 동창들에 소개, 경과보고, 추억의 동영상순으로 진행되었다.
20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친구들도 놀라는 표정이다. 분위기가 엄숙해진다. 자기도 이제 어느 때라도 저 세상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세월의 흔적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었다.
추억의 동영상은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로 준비하였다.
처음에는 한편으로 준비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아쉽다는 추진위원들의 강력한 권유로 전날 밤에 한편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경식 후배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고등학교 때 대유평으로 이사를 가던 장면, 학교 생활 모습, 수학여행 갔을 때 모습, 여학생과 어울러 찍은 사진, 졸업 후 처음 동창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어설픈 사진들, 동창회보 등등 다양한 자료를 동영상에 담았다.
60살이 된 친구들은 모두 그때를 회상하는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적막함이 행사장을 휘감는다.
이어서 추진위원장인 내가 환영사를 하고 동창회장이 기념사를 하였다.
수성고등학교 18회! 이건 나에게는 운명이다. 아니 어머니와도 같은 존대다.우리는 수성 18회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 자부심이 오늘의 수성 18회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를 만들어온 주인공은 물론 18회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 중에서도 10명의 동창회장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동창회가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이런 동창회장들을 위하여 작은 선물을 증정하였다. 아쉽게도 2명의 친구가 건강 등의 사정으로 불참하였다.
교가제창과 친구들과 허그를 마지막으로 기념행사는 마무리 되었다.
《저녁만찬》
기념행사가 끝나자 시간은 벌써 7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친구들은 술이 고픈지, 배가 고픈지 만찬장으로 가는 버스에 1분도 지체하지 않고 탑승하고 출발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찬장소는 2번씩이나 답사를 와서 고민 끝에 결정한 회집이다.
3층으로 된 근사한 회집에 65명의 친구들이 모였다.
졸업을 한 후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기는 처음이다.
소주한잔의 목넘김이 너무 강렬했다. 그리고 짜릿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때 선생님 몰래 먹었던 술맛이 재현되고 있었다..
처음먹는 술에 취해서 다음날까지 비몽사몽했던 기억! 술에 취해 이제 어른이 된 것같은 착각속에 빠졌던 그때!
나보다 많이 성숙했던 친구들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짐짓 그 감정을 숨기면서 ‘나도 너 만큼 성숙했다’는 표정을 지었던 그때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 올랐다.
시간이 10분도 지나지 않자 만찬장은 분위기는 달아 올랐다.
여기저기 술병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친구들이 보인다.
모두 한잔씩 술잔을 주고 받아야 하는데, 그 상대가 너무 많아 어리둥정하는 표정! 그래도 술이 센 친구들은 거의 한잔씩은 주고 받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사직한다. 이제는 원만한 큰소리로 이야기해서는 옆에 있는 친구들 목소리를 알아 들을 수 없다.
시간은 여기서 멈쳐져 있었으면 하는 표정들이다.
그래 친구들아 고생들했다. 여기까지 온다고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했겠는가!
이제 마음의 빗장을 풀자!
인생 2막에는 지금처럼 바보처럼 살지 말자꾸나!
무엇이 중요한지는 이심전심으로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만찬장앞은 바로 동해바다 뱃사장이다..
누군가가 먼저 폭죽놀이를 시작하였다.
어떤 친구는 다발로 폭죽에 불을 붙어 하늘로 날렸다.
봄 밤하늘로 날아 오르는 불빛은 장관을 이루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이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보다는 많이 취하지 않았다. 나이에서 오는 경륜은 술자리에서도 발휘가 된 모양이다.
숙소는 반별로 배정하고 가장 큰방은 게스트룸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
속초의 술은 다 먹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빙 둘러 앉아 술판을 버리는 친구들! 시내 노래방에 가자고 동반자를 구하러 다니는 친구들!
우리들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발가벗은채 밤을 보내고 있었다.
신발을 잊어 먹었다고 찾아 달라고 추진위원방으로 찾아온 진호 친구는 그래도 양반이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배낭이 없어졌다고 배낭을 찾아 내라고 난리(?)를 쳤던 원유친구는 새벽까지 배낭을 찾아다닌다고 잠자는 친구들을 다 깨운다.
나중에서 그 배낭은 친구방에 조신하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2일째 아침》
친구들과 함께 일요일 아침을 맞았다.
어제 분명 과음도 하고 잠도 몇시간 못 잤는데도 컨디션은 괜찮다.
지하에 있는 사우나로 향했다.
부지런한 친구들은 벌서 목욕을 마치고 나간다.
어제 술을 가장 많이 먹었던 학봉 친구가 보인다.
아침 산책을 하고 왔다는 것이다. 관리를 잘해 지금까지 대단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허리가 안좋다고 하자 나를 야외탕으로 데리고 가더니 탕속에서 발차기를 하는 자세를 알려준다. 표정에서 친구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을 읽고도 남았다.
나는 허리가 완쾌되면 한잔 사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12층에 있는 설악정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반갑다. 설악산》
설악산 관광은 자유관광으로 하기로 했다. 울산바위, 흔들바위, 비선대, 케이블카 중에서 선택하고 2시간 30분후에 만나기로 하였다.
어제 밤에 술을 많이 먹은 친구들이 호기있게 울산바위를 다녀오겠다고 출발한다. 나는 허리가 안좋아 몇몇의 친구들과 케이불카를 타고 권금성을 올라갔다. 권금성에서 바라보는 설악산 봉우리들은 무엇인가 나에게 말을 하려는 듯했다.
“건강해야한다. 나이 먹었다고 기죽지 말고 살아라” 나는 이렇게 들었다.
아무곳도 가지 않고 빈대떡, 도토리묵에 막거리를 먹는 친구들도 보인다. 학교다닐때 모습 그대로이다. 성격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가장 많은 친구들이 흔들바위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은 나중에 사진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마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설악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흔들바위였던 것 같았다. 엄청나게 커 보였던 흔들바위가 지금은 작은 돌맹이로 변했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꼈을 것이다.
《막국수와 서예에 빠지다》
설악산 관광을 마치고 미시령터널을 지나 점심을 먹기 위해 막국수집으로 향했다.
답사를 갔을 때 만난 씩씩한 주인아주머니는 신바람이 난 것 같았다. 수육에 막걸리, 막국수를 먹고 근처에 있는 여초서예기념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여여 김재일 친구가 퍼포먼스를 하였다. 서예대가인 친구는 커다란 화선지에 거침없이 사군자를 그려 나갔다. 먹물이 번지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서예는 과학이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강조하였다. 부채에다가 죽선을 쳐서 만든 작품을 친구들에게 경품으로 선물까지 하였다. 행운인지 주최측 농간인디 몰라도 내가 당첨되었다.
《갈비탕으로 아쉬움을 달래다》
수원으로 오는 길은 생각보다 차가 많았다.
처음 계획은 7시에 수원에 도착하여 해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노래를 하고 분위기가 고조되자 이대로 헤어질수 없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갑자기 60명이나 되는 인원이 저녁먹을 장소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파장동에 있는 갈비집에서 갈비탕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갈비탕을 먹으면서 졸업 40주년 추억여행의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몇몇 친구는 50주년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5년마다 이런 행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어떤 친구는 매년 이런 만남을 하자고 맞장구를 친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어떤 것에 배고팠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에필로그》
10년만에 만난 친구!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40년만에 처음만난 친구!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한 친구! 캐나다에서 달려온 친구!
그동안 조금 사이가 서먹서먹했던 친구!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던 한 친구!
이런 동창들이 친구라는 단어에 녹아들어 하나가 되었던 졸업 40주년 추억여행은 보람있고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40년만에 처음만난 친구, 이름보다는 별명이 먼저 기억이 나고, 바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가슴을 서로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모두들 인생 2막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멋진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함께 준비하고 고생한 추진위원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수성 18회 파이팅’을 외치면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